온난화의 영향으로 지금 바깥은 겨울 빗소리로 자욱합니다. 생각하고 말하고 움직이는 모든 일상에서 조금은 벗어난 쭉정이 같은 이 시간이 차라리 여유롭고 행복합니다. 자음과 모음을 인식하는 자판기의 오목, 볼록한 감촉이 정겹습니다. 아무것도 채우고 싶지 않고, 다만 내안에서 오래 묵은 기억들을 비우고 싶습니다. 그러다가 연전年前의 한 기억을 물컹 끄집어냅니다. 기억저편의 곱살 맞은 그리움의 일부분입니다. 목적지도 없이 떠나야겠다는 마음이 앞설 때 빈 륙색을 가져와 속을 채웠습니다. 부유물처럼 떠다니는 삶의 실체와 권태기에 접어든 삶의 허상과 생살을 뜯어내는 삶의 고달픔에서 벗어나고픈 일말의 탈출구에서 비롯된 나의 행동은 응원군도 없이 툴툴 집을 나섰습니다. 처음 나는 막막함과 만났고 두려움으로 자주 떠나온 집을 돌아보곤 했습니다. 그렇지만 무작정 먼 곳으로 가는 표를 끊어 기차를 탔습니다. 그 나직한 떨림, 정체를 알 수 없는 수상한 기운들이 도처에서 동그라미의 확산처럼 이동하고 있었습니다. 차창 밖 풍경은 가로로 책장을 넘겨주고, 지리산을 끼고도는 작은 간이역에 내려 둘레 길을 타며 민박집을 찾고 있었습니다. 겨울의 가운데서 산과 들과 강은 성체가 되기 위해 하늘빛으로 닮아가고 멀리서 개 짖는 소리 왕왕 들려왔습니다. 그러다가 문득 나직하고 선명한 타악기의 음성이 귓가에 옥양목 빨래처럼 눈부시게 펄럭이는 것을 감지했습니다. 진동과 공명의 어우러짐으로 쥐어짜고 보채면서 애절하게 가슴골을 넘나들며 안부를 묻는 소리였습니다. 저기, 풍물패가 마을을 돕니다. 날 매료시킨 꽹과리가 앞장서고 나발이며 장구며 징이며 상모돌리기를 따라 아이들과 동네 아낙들이 풍물패의 일원인 것처럼 어깨춤에 가락도 곁들입니다. 마을은 이미 하나로 뭉쳤고 하나로 모여들었습니다. 혼연일체渾然一體의 아름다운 장이 이곳에서 펼쳐져 있습니다. 누구하나 모나거나 툭 불거지거나 눈살을 찌푸리는 행동을 하지 않습니다. 서로를 믿어주고 서로를 아껴주며 서로의 위치를 존중해주고 있습니다. 청각을 두드리는 이 소리가 편안했고 행복했다면 뒤이은 장구며 나발이며 징이며 상쇄가 혼신의 힘으로 돌리는 열정의 상모돌리기가 곧이어 뒤를 따라주고 있었습니다. 돌아오는 기차 안에서 채집된 꽹과리 소리를 이제야 옮겨 싣습니다. 2020년에는 모두 형편이 나아지길 소망하며.  (한관식 칼럼 9)
최종편집: 2026-10-30 20:45: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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